작성일 : 2024.04.25 19:51 수정일 : 2024.04.25 20:06
작성자 : 편집부 (sisa0412@naver.com)
새단장을 마치고 새롭게 개관한 박물관
박물관(博物館)이라고 하면 웬지 고리타분하면서 재미없을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그러나 요즘은 박물관에서 다양한 전시회를 기획하면서 시민들의 발길을 유혹하는 프로그램을 다수 접할 수 있다.
운(運)이 좋아 오래동안 일본 문부성장학생 면접관으로 일한 적이 있다. 국비유학이기 때문에 한국의 우수한 인재들이 상당수 지원을 하기 때문에 면접관을 하면서 오히려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지원자 가운데 아직도 수험자 몇 명은 기억이 선명하다. 한국의 고문화를 연구하면서 연구가 끝나면 한국에 와서 박물관의 큐레이터 혹은 한국의 민속유물을 복원 연구하는 일을 하고 싶다고 피력한 지원자가 있었다. 지금쯤 어떤 모습일지, 학위는 받았는지, 소망하던 곳에서 열심히 연구를 하고 있는지 궁금하지만, 아쉽게도 면접관은 그 이후의 일은 알 수가 없다. 아무튼, 박물관 개관식에 참석해달라는 초청장이 와서 아침 일찍부터 서둘렀다.
공주석장리박물관 개관식에 참여하다
이번에 참석한 박물관은 충남 공주(公州)에 있는 선사유적발굴지에 설립된 석장리박물관이다. 관광컨설팅을 하면서 석장리 선사유적박물관의 보존과 발전을 위해 미력하나마 작은 역할을 한 것을 인연으로 이런저런 석장리 박물관과 연을 맺고 있다.
석장리 선사유적 박물관이 의미가 있는 것은 대한민국의 구석기 시대의 유물에 대한 본격적인 발굴을 하기 시작한 첫 발굴지였다는 점과, ‘설’로만 존재했던 한반도의 구석기 문화를 입증할 수 있는 다수의 유물이 처음 발견됨으로서 국사교과서에 실리고, 한반도의 구석기 문화가 일본보다 훨씬 앞서 존재했다는 것은 과학적으로 입증(立證)할 수 있었다는 점일 것이다.
또한 선사유적발굴의 의미는 일본이 부정하고 있는 일본열도에 대한 한반도인의 전래과정을 밝혀줄 수 있는 단초가 되기 때문이기도 하다. 현재 일본학자들은 한반도인의 일본열도 도래에 대해 부정적 입장을 취하고 있는 학자들이 많다. 그러나 석장리 유적은 한반도 역사 5천년을 단숨에 30만년 전으로 끌어올리고, 구석기 시대의 인류가 어떻게 이동했는지를 밝힘으로서 서기(書記)에 실리지 않은 많은 사실의 퍼즐을 맞출 수 있다는 점에서 한반도에서의 선사유적에 대한 지속적인 발굴과 연구가 필요하다는 단초를 제공했다.
유적 발굴가 손보기 선생
공주 석장리 선사유적의 발굴 대표자는 파른 손보기 선생이다. 1922년 출생하여 서울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1964년 캘리포니아대학에서 국사학 박사를 받고, 그 해 연세대 교수로 임용됐다. 그는 교수로 취임한 1964년 공주 석장리 구석기유적을 발굴하여, 일본이 비웃었던 한반도에서의 구석기시대 존재를 처음으로 증명한 것으로 유명해졌다. 그때까지만 해도 일제 밑에서 공부했던 많은 지식인들이 ‘일본에 앞서 한반도에 구석기인이 존재하지 않았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그는 13차례에 걸친 공주 석장리 선사유적 발굴에서 지금은 당연시 되고 있는 ‘방사성 탄소 연대 측정법’을 도입하는 등 자연과학 분석을 통한 고환경 연구를 진행시켰다. 퇴적물의 낟알 크기 분석과 꽃가루 분석, 나무 숯의 수종 감정에 의한 식물 유체 분석을 실시해서, 11가지 종류의 꽃가루와 포자 등을 검출했다. 이를 통해 구석기 문화의 성격을 밝히기 위한 종합적인 연구체계가 구체적으로 확립된 계기가 됐다고 볼 수 있다.
일본의 역사 왜곡의 진실
일본이 유적을 날조하면서까지 역사를 왜곡(歪曲)시키고자 하는 이유는, 일본인(日本人)이 우생학적으로 태생적 우월(優越)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한반도를 비롯한 동남아시아의 침략을 정당화시켜, 우수한 일본민족이 하등국가(下等國家)를 지배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논리를 뒷받침하기 위함이다.
과거 독일 히틀러가 게르만민족의 유전적(遺傳的) 우수성을 가지고 있다는 왜곡된 우생학적 논리를 가지고, 세상은 유전적 우월성을 가지고 있는 게르만족이 지배해야한다고 주장하며 전쟁을 일으키고, 유대인을 부적격한 인종으로 낙인(烙印)찍고 조직적으로 인종말살을 획책(劃策)하는 홀로코스트를 저질렀던 것과 무관치 않다.
일본(日本) 또한 독일과 비슷한 우생학적 관점을 가지고, 식민지 시절에 한센병 환자들을 소록도에 격리시키고, 각종 인체실험, 강제 불임수술 같은 천인공노(天人共怒)할 만행을 한국인들을 대상으로 저질렀다. 이들은 전쟁이 끝난 패전(敗戰) 후에도 자국민을 대상으로 우생보호법(優生保護法, Eugenic Protection Law)을 만들어서 ‘인간’ 대상으로 유전병이나 장애를 없앤다는 명목으로 단종법(斷種法, 강제불임수술)을 시행했다. 이런 행위는 식민지였던 대만(臺灣)에서도 똑같이 이루어졌다.
이 제도는 학자들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1996년 20세기에 이르러서야 ‘모체보호법’이라는 명칭변경과 동시에 낙태, 피임, 단종에 관한 조항이 삭제됐다. 일본 정부는 관련법이 개정되고도 20년 이상 침묵으로 일관하다가 6년 전인 2019년이 되어서야 아베총리가 ‘강제불임 및 강제낙태 피해자들에 대한 대책법이 참의원 만장일치 통과’되면서 처음으로 공식적인 사과문을 발표했다.
역사(歷史)를 왜곡하는 것과 일본인의 우수성을 증명하는 것의 상관관계는, 아직도 일본인의 대부분은 한반도를 통해 우수한 문화가 일본으로 전래되었다는 것에 대해 심각한 오류(誤謬)라고 지적한다. 즉, 한반도를 식민지배한 일본이 미개한 조선으로부터 문화와 문물이 전래되었다는 것을 인정할 수 없다는 잘못된 인식(認識)이 기저(基底)에 깔려 있는 것이다.
공주석징리 발굴의 의미
구석기 유물에 대한 발굴과 연구는 일본이 한국보다 훨씬 앞서있는 것이 사실이다. 따라서 일본은 일본열도에 퍼진 구석기시대의 유물, 유적에 대한 발굴과 연구가 폭넓게 이루어졌고, 한국은 손보기 선생의 공주 석장리 발굴(1964년)이 비로소 최초의 제대로 발굴된 구석기시대 유적이었던 것이고, 탄소연대측정기법 등 과학적인 근거를 통해 한반도에 구석기 인간이 존재했었음을 세계에 증명한 것이다.
구석기 시대는 전기, 중기, 후기로 나누어지며, 한반도에서 발견된 전기 구석기 유적은 단양 금굴(현재 한반도에서 발견된 구석기 시대 유적 중 가장 오래된 최고(最古)의 유적으로 약 70만년 전의 것으로 추정), 평안남도 상원 검은모루 동굴(약 60만년 전~40만년 전의 것으로 추정), 연천 전곡리(약 30만년 전 것으로 추정), 청주시 만수리 유적(약 50여만 년 전으로 추정) 등이 있고, 중기 구석기 유적은 웅기 굴포리(북한 최초 발굴 구석기 유적), 청원 두루봉 동굴(완벽한 모양의 인골 발견:흥수아이), 제천 점말 동굴(점말인 발견) 등이 있고, 후기 구석기 시대 유적은 고양시 탄현동 유적(후기 구석기 유물 307점과 문화층 출토), 함경북도 동광진(일제시대 발견), 전남 장흥 신북 유적(대규모 살림터, 2만 3천년 전의 마제석기 출토), 충북 진천 송두리 유적(4만 5천년 전의 타제석기와 구석기인의 흔적 발굴) 등이 있다. 한반도에서 전기 구석기 유적과 유물이 발견되었다는 것는 사람이 살았던 흔적을 통해 사람과 문화가 어디로 어떻게 이동했는지를 규명하는데 큰 지렛대 역할을 한다.
일본의 충격적인 구석기 유물 날조사건
반면, 일본은 한국에 비해 훨씬 오래전부터 구석기 유적에 대한 발굴작업이 대대적으로 이루어졌지만, 현재 정설로 되어 있는 것은 1만 6천 5백년 전으로 밝혀졌고, 이와테현 토오노시(岩手県遠野市) 카네도리유적(岩手県遠野市)가 5만년 전 혹은 8~9만년 전이라는 학설과 시마테현 이즈모시(島根県出雲市) 스나바라유적(砂原遺跡, 2009년 발굴)이 12만년 전이라는 발굴자의 견해가 있지만 확실치 않다.
그러다 보니, 한국의 구석기시대보다 훨씬 오래된 일본열도의 구석기 시대 유적을 발굴해서, 한반도에서 일본열로도 이동한 것이 아니라, 일본인 자체로 일본열도에서 자생한 우수한 일본민족을 증명해 내야 한다는 왜곡(歪曲)된 신념에 사로잡힌 일본의 한 사이비 역사학자가 사전에 미리 유물을 숨겨 두었다가 발굴단계에서 발견할 것처럼 해서 일본의 구석기시대를 한국보다 훨씬 앞선 70만년 전으로 둔갑시키려고 했던 ‘구석기유물 날조 사건(旧石器捏造事件)’이 벌어졌다.
유물 날조(捏造)사건을 일으킨 장본인은 후지무라 신이치(藤村新一)라는 사람으로, 본래 고고학자도 아닌 센다이육영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동북전력 자회사의 사원으로 있으면서 고고학에 흥미를 가지고 석기(石器)수집을 취미로 하면서 석기문화좌담회 등을 결성해서 활동하던 일반인이었다. 후지무라는 일본 구석기시대의 상한을 매번 10만년씩 앞당기는 성과를 보이면서 일본 전기․후기 구석기시대연구의 톱 그룹의 한사람으로 자리메김까지 했고, 일본의 각종 역사교과서에서 일본의 구석기시대를 70만년 정도 앞당겨 기술했다.
매번 발굴을 할 때마다 10만년씩 구석기 시대를 앞당기는 후지무라를 가리켜 일본에서는 ‘신의 손(神の手)’이라고 칭송해마지 않았지만, 이를 수상하게 여긴 마이니치신문(毎日新聞)북해도지사가 팀을 결성해서 발굴현장을 밤새도록 하리코미(잠복)를 했고, 후지무라 자신이 직접 석기(石器)를 유적에 파뭍는 광경을 사진과 비디오로 찍어서 유물의 날조(捏造)현장을 발표했다. 이로 인해 일본이 세계에 자랑했던 일본의 전기‧중기 구석기시대의 유적은 완전히 가치를 잃어버렸고, 이제까지 알려진 유적과 역사교과서를 수정하는 등 대대적인 숙청? 바람이 불었다.
왜 이렇게 유물(遺物)과 유적(遺蹟)을 날조(捏造)하면서까지 일본은 역사교과서에서 한반도보다 우월하다는 증명을 하려고 갖은 노력을 다하는 것일까?
광개토대왕비 글자를 변조한 일제
일본의 한반도 역사 왜곡(歪曲)에 대한 문제는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면 광개토대왕비문(好太王碑) 변조로 이어진다. 과거 1972년에 재일 사학자인 이진희씨는 여러 종류의 능비 탁본과 사진들을 비교‧검토한 결과 일본의 참모본부가 의도적으로 비문(碑文)에 석회를 발라서 왜(倭)의 한반도 활동과 관련된 일부 글자들을 변조했다는 주장을 제기해서 학계에 큰 충격을 준 적이 있다.
이진희씨에 따르면 광개토대왕비의 탁본을 일본으로 처음 보냈던 사코오 카게아키(酒匂景信, 명치시대의 일본군으로 중국 동북부에 있는 호태왕비를 처음 방문해서 그 탁본을 일본으로 가져온 사람)가 탁본을 뜨는 과정에서 몇몇 글자들을 의도적으로 고쳤고, 1900년 전후에는 일본 육국참모본부가 사코의 글자조작 사실을 은폐(隱蔽)하기 위해 비면(碑面)에 석회를 도포하여 글자를 고쳤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중국 길림성(吉林省) 문물고고학연구소는 현지에서 실제로 탁본을 전문으로 하고 있는 석공들과 그 자손들의 증언을 통해 중국인 석공들이 호태왕비의 표면에 석회를 도포해서 탁본을 떳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물론 이진희씨의 주장은 나중에 참조한 탁본보다 먼저 만든 묵본(墨本)이 발견(2005년)되었고, 그 내용이 사코오씨의 내용과 일치한다는 중국사회과학원 서건신(徐建新)씨의 발표가 있었다. 그러나 중국과 일본이 한반도의 역사를 자신들의 역사보다 하위(下位)에 두기 위한 끊임없는 왜곡(歪曲) 시도를 보이고 있는 것 또한 현실이다.
이번 석장리 박물관 상설전시관이 새롭게 단장을 하고 개관식을 하면서 손보기 선생의 자제를 초청했다. 그리고 당시에 발굴에 참여했던 생존하신 분들을 함께 모시고 개관식을 진행함으로서 그 의미는 더욱 각별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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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좌측부터 손명세(손보기 선생 자제), 김상헌(석장리 발굴 참가자), 최명세, 조한희, 이융조(석장리 발굴 참가자), 한창균(석장리 발굴 참가자) |
이번에 새롭게 단장한 공주 석장리 박물관은 발굴자들의 헌신적인 모습을 볼 수 있는 각종 서적과 영상, 구석기 시대의 선조들이 사용했던 돌도끼 등을 직접 만지고 체험할 수 있는 공간으로 새롭게 거듭났다. 또한 발견된 미라 가운데 가장 오래된 9만 2천 년 전의 이스라엘 카프제 동굴에서 발견된 25세 미만으로 추정되는 여인의 미라를 볼 수 있다.
어린이들을 동반한 가족을 위한 관람환경도 잘 만들어져 있으므로 체험과 학습, 역사적 진실을 마주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한다. 때마침 유치원 원아들이 개막식에 함께 참석해서 고사리 손을 잡고 박물관을 한 바퀴 돌아볼 수 있어 더 없이 즐거운 하루였다.

안용주
전 선문대학교 국제레저관광학과 교수
전 대전관광공사 상임이사
현 (사)한국지역혁신네트워크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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