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몸담고 있는 회사는 매년 3월에 ‘진급’ 시즌이 찾아온다. 이것은 누구에게는 기쁨과 설렘을 안겨주지만, 다른 이에게는 쓰디쓴 패배감을 맛보게 한다. 진급(進級)이라는 것이 급여의 상승, 직함의 변화, 그에 따르는 업무의 무게감 기타 등등이 있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역량과 노력에 대한 일종의 인정(認定)과 보상(補償)이다. 진급을 위한 판단근거에서 본인과 사측의 괴리(槐里)가 있을 때, 당사자로서는 납득하기 힘든 억울한 상황에 놓이게 된다.
올 3월에도 여지없이 크고 작은 진통을 겪어야 하는 시점이 왔고, 기억에 오래 남을 만한 케이스를 만났다. 직원에 대한 다양한 평가 기준 가운데, 한 가지 기준을 충족하지 못해 대리 진급을 못한 입사 3년차 직원이 있었다. 과장이나 부장, 임원도 아닌, 대리 진급에서 발생한 사례다.
어린 직원이지만 이번 진급에 있어서는 그 만의 세계가 있는 것이고, 내심 기대하고도 있었을 듯하여, 부서원 면담을 진행했다. 역시나 매우 억울해 하며, 납득할 수 없다는 말을 계속 쏟아냈다. 이미, 이쪽의 말 따윈 귀에 들리지도 않는 듯했다. 이렇게 감정이 상한 채로는 향후 업무에도 악영향을 끼칠 것이 분명했다. '서두르지 말자, 오늘은 들어주자'를 계속 되새기면서 인내심을 한껏 발휘해야만 했다. 다음날 다시 대화를 이어갔다. 어제의 격앙된 태도보다는 사뭇 진정되었고 진급은 아니지만, 제안할 수 있는 작은 지원과 내년을 기약하며 이번 진통은 일단락되었다.
27년차 회사원인 내 입장에서 3년차 직원의 진급 열망은 사뭇 귀여울 수도, 사소한 일일 수도 있고, 앞으로 겪어야 할 수 많은 과정들을 상상하면 정말 아무것도 아닌 일로 치부할 수도 있겠지만, 이번 일을 겪으면서 내 나름 너그러울 수 있고, 침착하게 대할 수 있었던 것은, 치기어린 나의 과거가 투영(投影)되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나에게도 입사 3~4년차, 한참 업무에 대한 의욕이 불타고, 그저 잘 하고 싶고, 인정받고 싶어 눈의 양옆을 가린 경주마처럼 앞만 보며 달렸던 지난 시절이 있었기에 그 직원의 마음과 열정, 감정들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아마 그런 과정을 거치지 않고 고위직으로 낙하산처럼 내려왔다면 어린 사원의 진급에 대한 열정과 갈망에 대해 이해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열정(熱情)'의 사전적 의미는 “어떠한 일에 대한 뜨거운 마음”이다. 나에게 “주어진 상황에 대해 진지하게 마주하고 뜨겁게 몰입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런 열정을 통해 대부분 썩 괜찮은 결과가 따라오고, 자기 만족감도 높아지며, 나의 사회적 평가 또한 긍정적으로 쌓여간다.
내가 몸담고 있는 직종의 특성상 다양한 만화와 웹툰을 접하게 된다. 그 가운데, 드라마로도 유명한 원작 윤태호 작가님의 미생(未生)은 공감과 현타를 넘나드는, 때로는 주옥 같은, 때로는 쓰디쓴, 그야말로 송곳 명대사가 작품 곳곳에서 튀어나온다.
그 명대사 중 과거의 나와, 지금 이 열정 넘치는 직원과 함께 공감 하고픈 대사가 있다.
“애는 쓰는데 자연스럽고, 열정적인데 무리가 없어. 어린 친구가 취해 있지 않더라구요.”
쉬운 듯 어려운 이야기다. 우리는 노력에 취하고, 도전에 취하고, 성공에 취하고, 결과에 취하고, 또 실패에 취하고 좌절에 취하기도 한다. 그러나 취하기보다는 앞으로 한걸음 나아갈 수 있는 나를 만들어 가길 간절히 바란다.
이주은
현 ㈜대원씨아이 상무이사
현 ㈜디씨더블유 대표이사
현 한국문화콘텐츠진흥원 전문가 콘텐츠 평가위원
최신 HOT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