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어사전에서 ‘문화인(文化人)’에 대해 검색하면 ‘높은 문화생활을 누리고 있거나 문화적 교양이 있는 사람’ 혹은 ‘학문・예술 따위의 분야에 종사하는 사람’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문화적 교양’이란 ‘학문, 예술 등 문화적 소양이 풍부하고, 깊이 있는 사고와 가치관을 가진 사람’으로 해석한다. 중학교까지 의무교육, 고교 무상교육, 대학진학율 74.5%(2025)를 보더라도, 현대사회는 이미 높아진 학력 수준과 다양한 문화향유 기회가 보편화되어 있어 ‘문화인’의 카테고리에 대부분 포함된다고 할 수 있다.
문화(文化)라는 단어에서 가장 먼저 연상되는 분은 당연 백범(白凡) 김구(金九, 1876~1949)선생님이다. 백범 선생님은 ‘나의 소원’에서 “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기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남의 침략에 가슴이 아팠으니, 내 나라가 남을 침략하는 것을 원치 아니한다. 우리의 부력(富力)은 우리의 생활을 풍족히 할 만하고, 우리의 강력(强力)은 남의 침략을 막을 만하면 족하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라고 적으셨다.
같은 시기에 백범선생님과 문화(文化)에 대해 함께 담론(談論)을 확장하셨을 분으로 위창(葦滄) 오세창(吳世昌, 1864~1953)선생님을 소개한다. 오세창선생님은 3・1독립선언문에 서명한 33인의 한 분으로, 독립선언문을 작성한 육당(六堂) 최남선(崔南善, 1890~1957)이 원고 검토를 부탁드린 시(詩)・서(書)・화(畵)에 일가(一家)를 이룬 나라의 큰 어른이셨다. 부친 역매(亦梅) 오경석(吳慶錫)을 비롯한 8대가 청나라 역관(譯官)을 지내다 보니 일찍부터 시대를 보는 안목(眼目)이 깊으셨다.
그런 연유로 조선 근대화를 외쳤던 박영효, 서재필, 김옥균, 유길준, 윤치호 등과 교류하다 ‘갑오개혁(甲午改革)’이 실패하면서 일본으로 망명한다. 망명길에서 후일 천도교 3대 교주가 되는 손병희선생님과의 교류를 통해 천도교(天道敎)에 입교하고, 이 만남을 통해 3・1독립선언문에 나란히 서명하게 된다. 귀국 후에 ‘만세보’를 창간하여 국채보상운동 등 계몽운동을 펼쳤고, 이후 ‘대한민보’를 발행하면서 최초의 ‘시사만화’ 제도를 도입하여 해학을 통해 날카로운 사회 비평을 실천했다.

대한민보 최초 시사만화
대(大) 대국(大局)의 간형(肝衡):국가정세의 바른 이해
한(韓) 한혼(韓魂)의 단취(團聚): 한민족의 혼을 통합
민(民) 민성(民聲)의 기관(機關): 백성의 목소리를 담아
보(報) 보도(報道)의 이채(異彩): 보도내용을 다채롭게
이미지출처: 우리문화신문
위창 오세창선생님은 3.1운동의 민족대표 33인으로 참여하면서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고, 해방 후에는 건국준비위원회 의원을 맡았으며, 1946년 8월 15일 제1회 해방기념식에서 미군정이 일본 궁내청에서 압수한 대한제국 국새를 민족 대표로 돌려받았다. 대한민국이 ‘높은 문화의 힘’을 갖기를 원했던 백범 김구선생님이 암살되었을 때 장례위원장직을 맡아서 백범 김구선생님의 마지막 가는 길을 함께 하셨다.
독립운동가로서의 위창 오세창보다 더욱 유명한 것은, 일본으로 침탈당하던 수많은 국보급 문화재를 간송(澗松) 전형필(全鎣弼,1906~1962)선생님과 함께 지켜낸 점이다. 어릴때부터 부친 오경석이 청나라를 다니면서 수집한 시(詩)・서(書)・화(畵)에 익숙했던 위창선생님은 부친을 이은 문화재 수집과 제자인 간송 전형필선생님이 수집한 국보급 문화재를 감정하고, 각 작품의 입수 경위와 수장 내력을 알 수 있도록 했다. 위창은 간송이 살 작품을 감식하고 작품에 발문(跋文, 작품의 입수 경위 등을 적은 글)이나 보관 상자에 상서(箱書: 상자 위에 쓰는 글씨)를 남겨 수장 내력을 쉽게 파악할 수 있도록 했다.
위창 오세창이 집필한 ‘근역화휘(槿域畵彙)’, ‘근역서화징(槿域書畫徵)’, ‘근역서화휘(槿域書畫彙)’ 등은 한국 미술사의 살아있는 교과서로 그 이름이 드높다. ‘근역화휘(槿域畵彙)’에는 총 189명의 244점의 서화 작품이 설명과 함께 기록되어 있다. ‘근역서화징(槿域書畫徵)’에는 기록에 나타난 역대 서화가를 신라, 고려, 조선(상/중/하) 5편으로 나누고, 이를 출생연도순으로 배열하는 방법을 썼다. 성명에는 자·호·본관·가세(家世)·출생연도·수학(受學)·관직·사망 연도 등의 대강을 소개한 다음, 그의 예술에 대한 기록과 논평을 싣고 그 서목을 밝혔으며, 유전되는 작품의 명칭과 소재를 기록했다. 채용한 서목은 270종이고 수록된 인명수는 1,117명이다.
이같이 방대한 자료를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서화가들에 대한 객관적인 서술을 통해 한국 역대의 서화가를 평가하는 가장 권위 있는 문헌으로 한국서화가연구, 한국 미술사의 기본서가 되었다. 광복이후 출간된 ‘한국서화인명사전’ 등은 모두 위창 오세창선생님의 ‘근역서화징(槿域書畫徵)’을 인용하고 있다.
위창선생님이 미술사에 관련된 출판물에 ‘근역(槿域: 무궁화 동산)’이라는 말을 쓰신 점을 곰곰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선생님이 힘는 삶을 영위하시던 기간은 조선(朝鮮)이 없어지고 대한제국(대한제국(大韓帝國))이 영멸(永滅)했다가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했던 시기였다. 나라의 이름이, 국가의 권위가 땅에 떨어지고, 나라를 잃어버린 버림받은 양떼에서 어느 이름도 쓸 수 없었던 선생님의 애틋함을 이해할 수 있다.
위창 선생님은 개인적으로는 서예에 출중했고 특히 전서(篆書)와 행서(行書)에 능하셨고, 전각(篆刻)에도 일각연이 있으셔서, ‘근역인수(槿域印藪)’를 통해 위창 선생 본인의 인장 225개를 포함한 850명 3,912개의 인장을 편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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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미지출처 : 국립중앙박물관 상설전시관 |
6.25전쟁이 발발하고 대구로 피난한 위창선생님은 대구 피난길에서 병에 들어 1953년 4월에 향년 90세의 나이로 소천하셨다. 사회장(社會葬)으로 치러진 위창 오세창의 유해는 범어사에 모셔졌다가 1954년 망우동 독립유공자 묘역으로 이장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위창 선생님의 공헌을 기려 1962년 3월에 대한민국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위창 오세창선생님은 근대시대를 대표하는 서예가・전각가이며 탁월한 감식안(鑑識眼)을 지닌 서화사 연구가다.
위창 오세창은 만해 한용운스님 회갑연에서 만해스님의 장수를 기리며 수자상(壽者相)이라는 글을 남겼다.
안용주
전 선문대학교 국제레저관광학과 교수
전 대전관광공사 상임이사
현 (사)한국지역혁신네트워크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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