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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정아 칼럼] 인생보다 긴, 예술에 새긴 기록의 힘

작성일 : 2024.05.03 12:13 수정일 : 2024.05.03 12:17

작성자 : 편집부 (sisa0412@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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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의 작은 날갯짓처럼 미세한 변화나 사소한 사건이 추후 예상치 못한 엄청난 결과나 파장으로 이어지게 되는 현상을 ‘나비효과’라고 부르는데, 사회적 문제의 경우 이러한 현상은 사진, 글, 그림이나 영상 등 대개는 어떤 사건의 ‘기록’들로부터 출발한다. 개념적으로 인간의 정신적이거나 지적이고 예술적인 산물을 의미하는 문화는 그런 기록들의 보고(寶庫)이기도 하다. 

국내 1호 기록학자이자 현 국가기록관리제도의 틀을 만들고 한국국가기록연구원장을 지낸 김익한 명지대학교 교수는 자신의 저서 <거인의 노트>에서 “비록 지금의 내가 난쟁이일지라도 매일의 기록이 쌓이면 우리는 그 위에서 더 멀리 보고 더 깊이 생각할 수 있다”며 자잘하더라도 일상을 기록하기를 권했는데, 인지와 인사이트 면에서도 기록의 의미와 중요성에 대해 생각해 볼 만한 대목이다.

기록의 관점에서 문화의 유형 중 하나인 예술도 마찬가지다. 지금은 기술의 발전으로 다양한 매체를 통해 기록할 수 있게 되었지만 아주 오래전에 인간이 남길 수 있었던 최초의 기록은 동굴 벽화, 룬 문자, 도형 등에 불과했다. 그 중에서도 그림이라는 매체로 전해지는 기록은 학습을 전제로 하는 문자와 달리 누구나 쉽게 기록, 혹은 메시지를 전할 수 있었기 때문에 유용한 소통 방법으로 활용되었는데, 중세 교회 건축양식 중 하나로 글을 읽지 못하는 일반 신자들을 위해 교육 내용을 담은 그림인 ‘스테인드글라스(Stained Glass. 빛으로 그려진 성경)’을 제작하여 사용해왔다는 건 잘 알려진 이야기다.

“그림을 걸었을 때 벽에도 기쁨을 주는 그런 예쁜 그림이 좋다”며 오귀스트 르누아르(Pierre-Auguste Renoir)가 말했던 것처럼 감상자에게 행복을 선사하는 것만으로도 예술은 충분히 자신의 역할을 하기때문에 반드시 사회적 메시지를 담을 필요는 없다. 하지만 예술작품을 만들어내는 예술가는 당대의 사회상에 영향을 받기 마련인지라 자연스럽게 혹은 의도적으로 작품 속에 사회적 메시지를 담게 되고 그 예술작품은 사회적 주목도에 따라 정비례하는 영향력을 갖곤 한다. 실제로 우리는 수많은 말보다 한 장의 사진이나 글, 또는 영상이 주는 파급력이 훨씬 더 크다는 걸 종종 경험하곤 한다. 

흔히 잔인한 달이라 일컫는 4월은 끝났지만 4월에 박제된 역사 속 사건들은 아물지 않은 상처로 저마다의 가슴에 자리하고 있는 것 같다. 그중 하나가 10주기를 맞은 올해까지도 진상규명을 못한 세월호가 아닐까 싶다. 그와 비슷한 사건이 1800년대 한 점의 그림 속에 있는데, 낭만주의를 탄생시킨 테오도르 제리코(Théodore Jean Douis Géricault)의 대작 ‘메두사호의 뗏목’(Le radeau de la Méduse, 1823, 프랑스 파리 루브르박물관 소장)이다. 이 그림은 당시 프랑스 왕실이 은폐하려던 선박 침몰사고를 다룬 작품으로 당시 상황을 생생하게 담아내기 위해 직접 생존자들을 찾아가 심층취재를 하고 시체안치소에서 시체들의 모습을 연구하며 신체를 데생하는 등 제리코의 절절한 노력이 매우 잘 드러나는 작품이다.

 

JEAN LOUIS THÉODORE GÉRICAULT - La Balsa de la Medusa (Museo del Louvre, 1818-19)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 외젠 들라크루아의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과 함께 루브르박물관 소장품 중에서 가장 유명한 작품이다.

 

1816년 7월의 그날, 세네갈 식민지 개척을 위해 네 척의 보급선과 400명을 태운 프랑스 원정대 메두사호가 환호 속에 출발했다. 당시 패전으로 땅에 떨어진 사기를 끌어올리기 위한 방편이었기에 국민들의 관심도 대단했다. 그러나 메두사호는 최대한 빨리 도착하려는 욕심과 바닷길을 모르는 무능한 선장으로 인해 아프리카 서안 브롱곳 연안에서 암초에 걸려 난파되고 만다.

선장과 고위급 신분의 승객들은 침몰해가는 배를 버리고 구명정에 올라 피신했지만 나머지 승객들은 짙은 어둠 속에서 들이치는 바닷물에 아비규환이었다. 그중 159명의 승객들이 부서지거나 뜯어낸 배의 파편으로 대형 뗏목을 만들어 로프로 선장의 구명정에 간신히 연결했지만 선장은 속도가 나지 않는다는 이유로 로프를 끊어버렸고 구조되기까지 뗏목의 생존자들은 바다에서 보름간 표류하며 약육강식이 지배하는 생지옥을 겪게 된다. 파도에 휩쓸려 죽고, 굶주려 죽고, 병으로 죽고, 급기야 살기 위해 인육까지 먹어가며 버텼지만 발견되었을 때의 생존자는 겨우 15명뿐이었다. 그마저도 구조된 후 5명이 더 목숨을 잃었으니 10명의 생존자만 남은 최악의 해상사고였다.

매관매직이 성행하던 당시 선박을 지휘해본 적도 없는 루이18세의 측근 쇼마레가 왕당파 귀족 출신 이유로 메두사호의 선장이 되었고, 직을 사려고 쓴 돈만큼 뒷돈을 받고 승객을 더 태우느라 승선 인원은 규정을 훨씬 넘겼으니 비극은 닥쳐올 수순이었다. 뗏목 생존자인 알렉상드르 코레아르와 앙리 사비니가 이듬해 책을 써서 사건을 고발했고, 그들의 기록에 깊은 인상을 받은 테오도르 제리코가 끔찍한 당시의 장면을 화폭에 담아내 온 나라가 발칵 뒤집혔다. 프랑스 왕실은 반대 논조의 글을 신문에 싣게 하는 등 수백명이 희생당한 참사를 숨기기에 급급했지만 사건은 결국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고 사람들은 분노했다. 그리고 책과 그림이라는 예술에 새긴 기록들이 단초가 되어 무능과 부패로 점철된 부르봉 왕가는 1830년, 들끓는 민심 속에서 무너졌다.

인간의 삶은 유한하지만 인간이 예술에 새긴 기억의 기록은 필요한 시대와 만나 놀라운 영향력을 발휘하기 때문에 기록이 던지는 파급력은 실로 크다. 아주 작은 것일지라도 때에 따라서는 흐름을 바꾸고 역사를 만들기도 하니 말이다. 알고 보면 바다의 처음도 산기슭을 따라 흐르던 작은 물줄기에서부터 시작되었다.


 

하정아

㈜엠버스어스 대표
문화체육관광부 문화관광축제 평가위원
문화기획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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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의 : 박창규 기자 010-8713-57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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